[한규인 칼럼] -067- KTA 김세혁 전무이사에 대한 소고(小考)
[한규인 칼럼] -067- KTA 김세혁 전무이사에 대한 소고(小考)
  • 태권도타임즈
  • 승인 2013.07.11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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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TA 김세혁 전무이사에 대한 소고(小考)
  17개 시도협회 임원을 아우르고, 코치와 선수, 제도권 임원을 다독이며,

  원칙을 위반 때는 따가운 질책과 엄중한 잣대를 들이대는 냉철한 가슴을
  선수들이 맘 편하게 제기량을 충분히 발휘 할 수 있도록 조력하는 것이

                   임원들의 할 일이고, 경기단체의 사명이며,

                 이것이 곧 경기력 향상의 지름길임을 명심해야






태권도 코치(사범)나 태권도관계 체육교사를 하면서 20~30 여 년간 선수를 육성해본 코치, 감독이라면 태권도경기의 근대변천사에 대해 나름대로 한마디씩 할 수 있고, 말할 자격 또한 인정해야 할 것이다.

승자의 영광 뒤안길에 숨은 얘기이며, 패자의 슬픔 뒤에 아픈 과거와 승복 못 할 안타까운 얘기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갈 것이다.

그들 중에는 명예와 부를 거머쥔 몇 안 되는 인물들이 있다. 제일 안정된 직업에 선택된 대학의 교수라는 직업과 그 다음은 유명 실업팀의 감독이나 코치일 것이다. 그 중에서도 명예와 부, 그리고 출세까지 거머쥔 인물이라면 단연 김세혁 전무이사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말도 많았고, 탈도 많았지만, 그 만의 특기라 할 수 있는 끈질긴 승부정신과 욕망, 명예욕과 정치력(?)은 수많은 난관들을 극복하며, 싸움닭의 조련사에서 KTA 전무이사에 등극했다.

새롭게 출발한 김태환 호(号)의 조타수로써 임시대의원 총회에서 고배를 맛 보았고, 1년짜리 전무이사라는 혹평을 받으며 출범을 했으나, 타협과 배려, 슬기롭고 온화한 모습으로 변신하고자 부단히 노력을 하고있다고 한다.

필자는 김전무를 지근거리에서 30여년을 관심 있게 지켜보면서 김전무가 태권도 자서전을 쓴다면 60%정도는 정리할 수 있다고 생각되어 선배로서 보고, 느낌점과 몇 가지 당부의 말을 전하고자 한다.

1980년도 초반, 필자는 김전무와 홍콩, 대만, 마카오에 소규모 시범단을 꾸려 방문한 적이 있었다. 20대 후반 체육교사인 그는 젊고, 싱그러웠고, 미소가 떠나지 않는 풋풋한 청년이였으며 겸손함까지 갖춘 태권도인이였다. 시범시 뒤돌아 이단 옆차기 위력 격파는 일품이였다.

마카오에서 시범을 마친 날, 귀국하면 학생들에게 태극 7장을 지도해야 한다며 정확한 동작과 설명을 청해서 호텔복도에서 성인태권도 유단자 제자들에게 설명하던 대로 품새를 같이 했던 기억이 엊그제 같은데 그 풋풋했던 청년이 이젠 60줄이 되었다.

당시 학교 체육계, 특히 태권도판에는 경희대출신이 아니면 명함도 내밀기 어려울 때였으나, 동아대 출신인 김전무는 해병대 대표선수시절의 투지와 특유의 재치와 친화력으로 걸출한 선수들을 육성하였다. 이는 경희대 출신 선배감독의 음성적인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 할 수 있었지만, 그는 자타가 인정하는 명코치가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부산사나이의 기질이 표출되어 자존심도 강해지며, 좀은 건방(?)스러워졌다고 표현 될 만큼 성장하였다.

60세를 넘나드는 코치(사범)들이라면, 경기장에서 선수를 출전시키고 코치석에 앉아있으면 심판과의 갈등, 코치와 코치간의 갈등, 경기시 코치의 지시대로 시합을 운영하지 못하는 선수에 대한 불만 등은 코치들만이 느낄 수 있는 애환의 세상일 것이다.

태권도 경기 초기에는 힘(권력)있는 자가 배심원 우측에 서면 우측선수의 손이, 좌측에 서 있으면 (경기결과와 관계없이) 좌측선수의 손이 하늘을 찌르는 시절도 있었으니…. 그 당시에는 어찌 코치감독이 힘 있는 자의 눈치보기를 넘어서 눈밖에 나지 않으려는 물밑작전이 전쟁(?)수준이었다면 심한 표현일까?

코치로서 자리를 잡은 김코치는 코치협의회를 구성하여, 경기장에서는 대결을 하는 적군이지만, 경기장 질서, 부조리근절, 지도자로서의 자질향상을 도모하는 등의 과제를 해결코져 노력하였으나, 제도권에서는 귀찮은 모임, 심판들에게는 안티 세력(?)으로 이를 보는 시각의 차가 심하였었다. 코치들 또한 경기장에 서면 선수들의 입상을 위한 이해득실에 따라 승리를 위한 각개전투가 전개되어 명분만 유지하는 친목(?)단체 이외의 역할을 기대하지 못했다.

김세혁코치는 별 탈 없이 명코치 대열에서 활동을 했고, 1987년에는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를 MBC TV에서 태권도 경기사상 최초로 생방송해설을 하는 해설자가 됐고, 88서울올림픽 태권도시범경기에서는 한국대표팀 코치로 승승장구 했다.

그 후 경기장(국기원)에서 심판판정에 불만을 토로하며 좀은 거친 항의를 하다가 부형과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제도권의 힘 있는 모 인사에게 손바닥으로 뒷통수를 맞고, 순간 모 인사에게 거친 항의를 한 것이 도화선이 되어서 직장에 사표도 내게 되었고, 태권도 코치는 물론, 태권도인의 생명줄이 시드는 듯했다.

그러나 특유의 투지와 끈기를 학구열로 승화시키며 세계최초로 겨루기론을 테입으로 편찬하는 등, 태권도의 끈을 놓지 않으며 동분서주하며 재기의 기회를 모색했다. 그때 삼성그룹에서 태권도협회의 후원사가 됐고, 삼성태권도단을 창단했다.

김 전무는 객관적으로 지도자로서의 실력도 인정받았지만, 일종의 동정심(사형선고에 대한 권력의 반작용)도 한 몫하여 주변에서 적극적인 천거로 삼성그룹 태권도단 감독으로 스카웃 됐다.

이는 가뭄의 위기를 맞은 물고기가 강을 만난격이 되었고, 다시 승승장구하였다. 15여년간 5명의 올림픽 메달리스트를 배출하며 하얀머리(일명:백대가리)가 대한민국 태권도코치의 대명사가 될 만큼 유명인사가 됐고, 부(富)도 아우르며 우수한 선수들을 보유하며 코치들의 부러움과 질시를 한 몸에 받았다.

거리낌없는 직설적 어투, 올림픽대회 코치로 연속 참가, 삼성그룹의 감독이란 직책과 우수한 선수 보유등은 많은 적을 양산하였고, 가끔은 대표선수의 올림픽대회출전욕심으로 제도권과 마찰을 빚기도 하였다.

또한, 삼성팀의 코치들이 코치로서의 제역할을 오랫동안 수행하지 못하고 교체되는 것에 대한 각종 세평이 있으나 이에 대해서는 같이 근무했던 코치나 감독이 잘 아는 일이겠지만, 아마도 덕장(德將)으로서의 배려심 부족이나 선수들에 대한 과욕, 또는 유아독존적인 사고에서 기인된 일이라고 생각된다.

삼성감독 생활 15년여를 마친 후에도 그는 경기지도자로서의 추종을 불허하는 자리를 차지해 후배들에게 볼멘소리를 들으면서도 이젠, KTA는 경기단체이니 정통 경기인 출신이 전무이사를 할 때가 됐다며 속내를 드러내기도 했다.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으나 협회사상 최초로 경기지도자가 전무이사가 됐다.


백인백색의 인간세상이니 개인성품에 관한 얘기는 각자의 판단에 맡기기로 하자.

이제, 백전노장 김세혁전무는 ‘귀가 순해져서 모든 말을 객관적 입장에서 듣고 이해할 수 있다.’는 이순(耳順)의 나이가 되었다. 상대를 이기기 위한 방법만을 모색하던 경기지도자가 아니다. 17개 시도협회 임원을 아우르고, 코치, 선수, 제도권 임원을 다독이며, 원칙을 위반 했을 때는 따가운 질책과 때론 엄중한 잣대를 들이대는 냉철한 가슴을 가진 판‧검사와 변호사 역할까지도 해야 하는 막중한 위치인 전무이사란 공인이다.

과거(10여년전)에는 권위로서의 막강한 자리였다면 지금은 올챙이적의 불안함과 나약하기만 했던 과거를 돌이켜 보며 왕개구리의 오만함을 행사하는 왕개구리가 아니라, 많은 올챙이들이 개구리로 성장하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제도를 개선하고, 학부모의 입장에서, 선수의 입장에서, 코치의 입장에서 경기를 보고, 경기장내에서의 부조리, 불합리한 점이 없도록 최선을 다해 개선해 나가야 한다.

최근 박근혜정부는 정부의 일하는 방식에 우선순위를 국민과의 소통, 부처간 협의에 의한 서비스 지향적인 업무체계로 전환하고, 부처별, 단위업무별 행정 프로세스(process)를 “국민중심으로 확! 바꾼다”고 한다.

KTA와 각시도협회도 이에 호응하는 조처를 취해야 하고 이일의 중심에는 김세혁전무의 역할이 중차대하다.

전임 전무이사가 지방협회전무이사와 화합(?)을 잘했다고 하는가 하면, 일부에서는 시도협회 눈치를 보며 끌려다녔다고 폄훼하기도 한다. 김전무는 곁에서 지켜보았으니 잘 파악하고 있을것이다. 이것은 전무이사로서의 역할을 잘 수행 할 수 있는 촉매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KTA 회장기 대회에 김태환회장이 참석하여, 만찬장은 오랫만에 고무적인 분위기였다고 들린다. 각 시도 협회 전무이사들이 심사관계로 일찍 자리를 뜬 것에 대한 말꾼들의 입방아가 있었지만, 몇 군데의 전무이사들과의 불협화음은 인간사에 있을 수 있는 일이며, 이는 간선제인 대의원선거제도 속에 숨어있는 복병으로 해결해야 될 과제중 하나이다.

김태환호는 태생적과오가 적지 않았었고, 김전무 또한 싸움닭대장으로서의 지난 과거가 있어 이 모두를 말끔히 씻도록 확실한 변신을 위해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참으로 어려운 주문이다.

덕불고 필유린(德不孤 必有隣)이라 했다. 김전무로서는 경기장에서의 감독시절보다 더 울화가 치밀고, 속이 더 타들어가더라고 말 많고 탈도 많은 협회의 할일들은 극복하여야 할 과제이다.
KTA는 경기단체이다.

경기는 선수가 없이는 각종대회가 성립 될 수가 없다. 각 시도협회전무이사들도 이점에선 마찬가지이다. KTA 전무, 각시도협회전무들은 옛날 경기장에 비하면 엄청나게 맑아졌고, 비교 할 수 없이 변화가 됐다고 안주해서는 아니 된다. 선수들이 맘 편하게 제기량을 충분히 발휘 할 수 있도록 조력하는 것이 임원들의 할 일이고, 경기단체의 사명이며, 이것이 곧 경기력 향상의 지름길임을 명심해야 한다.

단 일년짜리 전무이사가 될 지언정. 경기단체의 국무총리 역할로서의 신념은 흔들림이 없어야 하며, 당당하게 언행일치로 모범을 보일 때 당면한 난관들은 한 가지씩 해결되고 보람을 느끼게 될 것이다.

“어째기 넌 워째, 인제 나도 막가야제. 체면 차리고 순리로 헐라는 놈만 빙신되는 것이여! 임자 없는 땅이고, 임자 없는 구녕엔 말뚝먼첨 질이란 옛말이 그른디가 하나도 없드란 말이여….”
조정래 소설 아리랑 중의 한 귀절이다.

“임자 없는 땅과 임자 없는 구멍에는 말뚝 먼저 박는 놈이 제일이다”라는 속담이 판을 쳐서야 태권도의 미래는 맑고 밝아질 수가 없다.

승자독식의 경기장이지만, 태권도의 도(道)를 수련한 선수와 지도자가 공존하는 곳이니 말이다.

이순(耳順)에 맡은 직분을 소명의식과 사명감을 갖고, 언행일치한다면, 어떤 고난도 극복하리라 생각하며, ‘침묵은 금이고, 다변은 은이다.’라는 격언을 김전무께 드리며 고언을 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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