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태권도협회 창립의 과정과 제도권의 태권도史
대한태권도협회 창립의 과정과 제도권의 태권도史
  • 태권도타임즈
  • 승인 2011.02.17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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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F와 최홍희
대한태권도협회 창립의 사진
대한태권도협회 창립의 과정은 태권도 역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태권도의 공식적인 행사(시범)를 두고 세계연맹 차장을 지낸 이경명교수는 1959년 3월 국군태권도시범단을 인정하지 않고 있지만, 1959년 3월 월남과 대만에 파견된 전 ITF 최홍희가 인솔한 국군태권도시범단이 대한민국 최초의 해외 공식 시범단으로 태권도 역사에 기록 되어야 하며, 그로부터 6개월 뒤, 1959년 9월 최홍희 주도로 창립한 대한태권도협회의 과정을 밝혀 보기로 한다.

1997년 3월 시사주간지 인사이더월드에 처음 공개 된 대한태권도협회창립 ; 앞줄 좌로부터, 황기, 윤쾌병, 최홍희, 노병직, 체육계임원, 이남석, 엄운규, 현종명, 뒤줄에  고재천, 남태희, 김선구 등이 함께했다


당시 보도된 대한태권도협회 임원


채명신장군과 최홍희

태권도사에서 ITF와 최홍희 부분은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아있다.
분명 한 것은, 태권도 역사를 김운용 시대에 연구해서 국기원에 상납한 태권도학자들은 ITF와 최홍희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태권도사 강의(2005년 이문출판사)”를 집필한 송형석 교수는 자신의 책 서문에 국기원에서 쓴 “국기태권도교본”을 현존하는 “태권도 경전”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지만 필자는 국기원에서 집필한 태권도교본은 태권도역사를 가장 철저하게 왜곡한 “태권도교본”임을 의심치 않는다.

태권도역사에서 ITF와 최홍희는 제도권 태권도 역사에서 다루고 싶지 않는 아킬레스건 이다.

어느 태권도원로가 세상을 떠나기 전 자신이 소장한 자료를 제자에게 주면서 때가 되면 자료를 밝히라고 부탁한 사실을 국기원이라는 틀 안에서 태권도 역사를 기록한 학자들은 어떻게 해석 할 것인가?

세상에 밝혀야 하는 진실을 두고 때(時)가 필요 한 것이 현재 태권도계의 모습이다.

비록 시대에 편승하고자 태권도역사를 제도권에 바쳐 왔더라도 그들은 지금이라도 자신의 잘못된 기록을 인정하고 올바른 태권도사를 정립하는데 앞장서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자신들이 쓴 태권도사를 합리화 하고자 또 다른 논리를 가지고 혼돈의 태권도사를 계속 쓰고 있다.

서울대 출신의 송형석교수를 비롯, 이창후교수 등의 태권도사 엘리트 학자들은 지금 필자가 논하고 있는 역사를 소장학자들의 무식함이라고 폄훼, 자신의 저서에 기록하고 있다.

필자는 현재 국기원에 원장으로 있는 강원식씨와 만남을 이야기로 태권도협회 창립의 과정을 밝혀 보고, 서울대 출신 교수들의 태권도사에 반론을 제시 하고자 한다.1993년 5월 필자는 네덜란드에서 최홍희 ITF총재를 처음 만나면서 또 다른 태권도(ITF)와 태권도의 진실을 접하게 되었다.

당시 ITF의 자료는 국내에서는 철저하게 무시되고, 사장되어 왔으며 세상에 나올 수 없었다. 국기원과 대한태권도협회의 기록에는 “최홍희”란 이름조차도 찾아볼 수 없었던 시대였다.

위 대한태권도협회창립의 사진을 1997년 캐나다에서 최홍희 총재로부터 입수한 필자는 사진속의 주인공의 한사람인 엄운규 국기원 부원장(당시)과 세계연맹 차장으로 있던 이경명교수, 그리고 태권도신문사 사장으로 있던 강원식씨(현 국기원장)를 만났다. 사진의 배경과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서였다.

강원식씨는 당시 처음 접한 대한태권도협회 창립의 사진을 보고 태권도사에 귀중한 자료라고 인정하면서 놀라움을 표시하였다.

참고로 이 사진은 1997년 국내에서 처음 공개되었다.
필자가 보여준 귀중한 자료(대태협창립사진)는 나중에 알았지만 대한태권도협회의 역사 정립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강원식씨가 말한 소중한 사진이 때(時)를 잘못만나 나타 난 것이다.

강원식 국기원장은 원장 취임 전 대한태권도협회 소속의 “역사편찬위원장”으로 근무했다.

그가 근무한 동안에도 태권도사의 정립과 변화는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현재는 대태협의 역사편찬위원장보다 비교도 되지 않는 국기원장직에 있지만 태권도역사의 올바른 기록은 기대하지 않는다.

대한태권도협회의 연혁은, 1961년 태수도협회를 국기원과 대태협에서는 창립일로 기록하고 있으나 사실은 이보다 2년 전 1959년 9월 3일 체육회 건물에서 최홍희 주도로 창립되었다.

1959년 9월 최홍희는 당시 공수도를 고집한 이종우,노병직,윤쾌병 그리고 당수도를 주장한 황기를 제치고 태권도협회를 창립하고 체육회 가입절차를 밟던 중 4.19가 일어나고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면서 군복을 벗고 1961년 말레이시아 초대대사로 임명되어 국내를 떠나게 된다.

1959년 9월 최홍희 주도의 태권도협회 창립은 기사로 보도 되어 공식화 되었으며 당시 임원은 회장에 최홍희,부회장 노병직,윤쾌병 이사장 황기, 상무이사 현종명, 이남석, 이종우, 고재천, 이영섭 등이다.

최홍희가 국내 없는 틈을 이용해서 공수도와 당수도란 무도명을 굽히지 않았던 이종우,노병직 등은 태권도가 아닌 태수도협회를 1961년 다시 창립하고 회장에 채명신 장군을 옹립했다.

그러나 말레이시아 대사를 끝내고 국내로 들어온 최홍희는 1965년 다시 태수도협회를 태권도협회로 개칭하고 협회장으로 취임하였으나 태수도를 고집한 일부 초대관장들의 마찰로 오랫동안 회장을 역임하지 못하고 1966년 국제조직인 ITF(국제태권도연맹)을 창설, 대한태권도협회에서 물러났다.

역사란 가정이 없지만, 당시 최홍희가 태권도를 고집하지 않고 이종우, 노병직, 윤쾌병 등이 주장한 태수도협회를 받아 들였다면 지금은 태권도가 아닌 “태수도”로 정착했을 것이다.  최홍희가 망명을 떠난 1973년 이후 태권도 역사를 연구한 학자들은 태권도사를 정립하는 과정에서 ITF와 최홍희의 존재를 연구,인정하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ITF와 최홍희를 인정하는 순간, 자신들이 주장한 태권도사가 모두 거짓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념을 떠나서 최홍희는 태권도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다. 태권도사를 기록한 학자들이 시대의 눈치를 보면서 태권도 탄생의 핵심을 숨겨왔던 사실들이 김운용의 독재를 타도하며 태권도 개혁의 주역 이였던 현 강원식 국기원장 아래 에서는 어떻게 태권도사가 정립될지 두고 볼일이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도 1980년대 국기원에서 편찬한 태권도교본을 살아있는 태권도경전이라고 주장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정순천 기자 taekwondo11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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