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형 교본-태권도 품새란 무엇인가?(2)
이규형 교본-태권도 품새란 무엇인가?(2)
  • 태권도타임즈
  • 승인 2010.11.10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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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새로운 태권도의 정의
 (1) 규범적(規範的)개념으로서의 태권도
【인간의 길로서의 태권도】

【기술의 길로서의 태권도】


 태권도와 개념과 복잡한 논의들은 대개 태권도를 규범적 즉 마땅히 따르고 지켜야 할 본보기. 사유(思惟)·의지(意志)·감정 등이 일정한 이상·목적 등을 이루기 위해 마땅히 따라야 할 법칙과 원리 논리의 진(眞), 도덕의 선(善), 예술의 미(美) 등 무술이나 기예 따위를 행하는 방법의 의미로 사용할 때 생겨난다. 여기서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도(道)라는 글자의 해석이다. 도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태권도의 규범적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다. 사회적 존재는 필연적으로 타인과 더불어 서로 협력하여 공동생활을 하는 인류의 집단으로, 온갖 형태의 인간의 집단적 생활을 하면서 살아가야만 한다.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려면 공동체적 관습과 질서를 이해하고 직접 몸으로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사회생활 자체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사람이 마땅히 행하거나 지켜야 할 도리. 곧, 실제의 도덕규범이 되는 원리. 인륜, 이와 같은 공동체적 관습과 질서를 일컬어 우리는 윤리라고 부른다. 윤리는 사회생활을 가능하게 해주는 행위규범이라는 점에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따라야 할 길(道)인 것이다. 태권도인 역시 사회생활을 해야만 하는 인간이라는 점에서 인간의 길인 윤리를 외면할 수 없다. 특히 태권도처럼 폭력성이 강한 행위양식을 몸에 익힌 집단의 경우에는 보다 강한 윤리적 소양을 견지해야만 한다. 힘(武力)은 그 힘을 올바로 쓸 수 있는 사람이 지녀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을 때 사회는 더 어두워지는 것이다.

 윤리는 사회문화적 산물이다. 따라서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윤리가 존재한다. 유교 윤리, 청교도 윤리, 기독교 윤리, 기사도와 같은 봉건 윤리, 불교 윤리 등이 몇 가지 예이다. 태권도인은 어떤 윤리를 따를 것인가? 태권도에서 강조하고 있는 기존의 윤리를 분석해 보면 일본의 가마쿠라시대에 형성된 사무라이 윤리(무사도)가 주류를 이루고 있고, 거기에 가부장적 유교 윤리와 고행과 극기를 강조하는 불교 윤리, 그리고 주군에 충성을 강조하는 봉건 윤리가 복합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과연 평등을 이념으로 삼고 있는 현대 민주주의사회에서 이와 같은 윤리들이 여전히 타당성을 지닐 수 있는가?

 오늘날 태권도는 한국이라는 지역적 특수성을 넘어서 범세계적 신체문화로 자리잡아가고 있으며, 바야흐로 21세기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따라서 지역적 특수성을 강조하는 윤리보다는 보편성을 갖는 윤리가 요구된다고 말할 수 있다. 국가와 주군에 충성을 강요하는 전사의 윤리나 위계질서를 강조하는 유교적 가부장윤리, 인내와 고행, 무욕을 강조하는 불교윤리 등은 나름대로 가치가 있지만 세계화를 지향하는 21세기 문턱에서 이와 같은 전 근대적인 윤리가 과연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가질지는 의문이다.

 앞으로 우리가 만들어 가야 할 태권도인의 윤리는 이제 “우리 것”만 강조하는 소아적(小我的) 태도가 아니라 범 세계 시민주의(Cosmopolitanism)를 근간으로 하는 대아적(大我的) 태도를 출발점으로 삼아야만 한다. 보편윤리를 추구하는 태권도는 한국적 윤리와 동양적 윤리라는 전통적 틀을 넘어서 모든 문화권의 인간이 따라갈 수 있는 인간의 길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태권도가 기술의 길이라고 했을 때 그 기술의 길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길일까? 기술의 길은 최소한 강함과 건강함을 동시에 보장해 줄 수 있는 길이라야만 한다. 강함을 강조한 나머지 건강을 해친다거나, 건강만을 강조한 나머지 신체의 강해짐에 소홀히 한다면 참다운 의미에서 태권도의 길이 아니다. 무술의 길은 일차적으로 강함을 추구하는 길이다. 이 강함은 각종 기술의 수련을 통해 구현된다. 한편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다. 따라서 아무리 노력해도 완벽하게 강해질 수는 없다. ‘완벽한 강함’이라는 이상적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노력하는 과정만이 있을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철학자들은 인간을 “되어가는 존재(das werdende Weden)”로 규정한 바 있다. 완벽하게 강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은 건강을 전제로 한다. 건강하지 못하면 강해지는 과정을 지속적으로 밟아 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무술이든 그것이 강함을 지향한다면 결코 수련자의 건강에 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 

 무술의 기술수련이 건강을 해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리 몸을 해부학적으로 잘 이해하여야만 한다. 우리의 몸은 일정한 운동 원리에 따라 작동하고 있다. 예컨대 우리 몸의 관절 중에는 전후운동을 위한 것, 회전운동을 위한 것 등 각각의 기능에 따라 그 주변의 인대와 건이 형성되어 있다. 이와 같은 원리를 무시한 채 특정한 동작을 오랜 시간 동안 반복하여 수련하게 될 경우에 인대난 건이 상해를 입어 건강을 해칠 수도 있다. 따라서 관절의 작용원리를 잘 이해하고 그에 따라 운동을 수행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태권도의 기술수련이 건강에 해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해부학적으로 몸의 작용에 위배되는 기술은 피해야 한다. 즉 몸과 몸의 기능, 그리고 몸의 운동 원리를 바르게 이해하고 있어야만 한다. 몸의 관절과 근육의 작용을 잘 이해하고, 각각의 약점과 강점을 터득해야 하며, 기의 원활한 흐름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태권도 기술이 추구해야만 하는 길은 한마디로 “바른” 운동방법을 추구하는 길이라 할 수 있다. 이 “바른” 운동방법만이 강함과 건강함을 동시에 보장해 줄 수 있다.

 그렇다면 “바른”운동방법이란 어떤 것일까? 우리에게 익숙한 “바른”운동방법은 체육학이 제시하는 방법이다. 서양인들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형성된 현 체육학에서는 “바른” 운동방법을 역학, 생리학, 심리학, 등의 과학적 관점에서 설명한다. 역학은 근육과 관절 운동의 효율성에 역점을 두며, 생리학은 에너지대사의 효율성을 강조하고, 심리학은 운동 시 불안, 긴장, 자신감 등과 같은 정서활동의 조절에 초점을 맞춘다. 이와 같은 “바른”운동방법에 대한 체육학의 설명은 대개 타자관찰과 실험을 통해 얻어진다. 이러한 설명은 매우 설득력이 있으며 현재 여러 가지 운동방법에 응용되고 있으나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점이 내포되어 있다. 첫째는 설명이 대단히 분석적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인간의 운동을 통합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동양의 전통적인 운동학을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인간의 운동을 분석적이 아닌 통합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이며, 타자관찰이 아니 자기관찰을 통해 바라보려는 시도인 것이다. 체육학적 운동이해와 동양의 전통적 운동학을 적절히 조화시켜 “바른” 운동방법을 구상할 때 기술체계로서 태권도가 가야할 길은 보다 구체화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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