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운규 전 국기원장과 태권도史(완결)
엄운규 전 국기원장과 태권도史(완결)
  • 태권도타임즈
  • 승인 2010.02.26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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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운규 전 국기원장은 청도관 창관과 함께한 태권도 1세대 원로이다.
 태권도史의 산 증인으로서의 엄운규 원장의 활동은 이원국 청도관 초대 관장의 마지막 남은 사진을 정리하면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초대 5개관 관장들의 태권도 태동기의 유대관계-
필자는 전편에서 언급한 사진들을 유심히 비교․분석하면서 태권도史의 중요하고도 새로운 사실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엄운규 원장이 소년 시절에 청도관에서 활동할 당시 청도관 2회 심사대회에 참가한 인물들 중에는 놀랍게도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윤병인 YMCA권법(창무관)과 전상섭 조선연무관(지도관)관장의 활동과 그 뒤에 창관되는 (1947년)송무관, 노병직 관장이 있었다.
 그동안 태권도 역사가 기록된 여러 가지 논문과 관련 내용 중에는 정확한 각(各) 관(館)의 창관 년도와 배경이 분명하지 않은 부분이 많다.
 필자의 소견으로는 5개관의 “창관년도”에는 보이지 않는 알력이 있었으며, 그것은 정통성과 더불어 선두 주자로서 자리 다툼의 역사도 한 몫을 했다고 여겨진다. 해방이후 활동한 4개관들(지도관, 송무관, 무덕관, 창무관)과 다르게 청도관은 해방전 1944년 이미 국내에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원국 청도관장의 일제하에서 가질 수 있는 그만의 정치적 파워가 있어 가능했고, 해서 청도관은 5개 기간 관(館) 중에서도 가장 먼저 개관한 역사적 기록에는 틀림이 없다.
다만, 이 과정에서 지도관, 송무관, 무덕관, 창무관 초대 관장들이 청도관 기념행사(심사대회, 연무대회) 때마다 참석함으로서 나름대로의 유대 관계를 형성한 것은 자신들의 입지를 다지기 위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 과정에서도 엄운규 전 원장은 심사대회와 각종 행사에는 빠지지 않고 활동한 것을 엿볼 수 있다.

-송무관 개관 연도-
지금까지 1946년으로 창관 기록된 송무관은 이번에 청도관 사진 자료에서 밝혀진 바로는 단기 4280년(서기 1947년) 11월 16일로 기록되어 있다.

(송무관 창립기념 당수도 특별연무대회 4280.11.16)

사진속의 기록 일자는 단기이며, “송무관 창립기념 당수도 특별연무대회”로 기록되어 이 사진속의 행사가 창관 1주년 기념인지, 아니면 창관 기념인지 좀 더 연구를 해봐야 알겠지만 필자의 견해로는 창관 기념일로 추정된다.
그이유로는, 당시(태권도 태동기)다른 관을 비롯 행사사진 기념일 기록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모두가 단기로 표시 되었으며, 행사일 기준을 “0회 기념” 이런 식으로 회(回)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외에도 위 사진속 내용 중에는 태권도사史에서 여러 가지 흥미로운 사실들이 발견된다.
중앙에 이원국 청도관 관장이 송무관 창관일에 참석한 것은 이원국 관장이 태권도 태동기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앞줄에 앉아 있는 송무관 창관자 노병직을 비롯해 그 옆으로 무덕관 황기 관장 등 초대 관장들의 모습들이다.

-송무관 창관 기념일 참석한 청도관의 사범단원-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청도관 2회 심사대회에서도 YMCA권법부(창무관) 윤병인을 비롯 조선연무관(지도관) 전상섭, 송무관, 노병직 등 각 관의 창설자들이 이원국 관장의 행사마다 참석함으로써 청도관 실세와 끈을 놓지 않는 모습들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분명하지 않지만 지도관의 분관으로 알려진 한무관 이교윤 관장의 모습도 위 사진속에 있는 것을 보면 이교윤의 한무관이 초창기 5개관 이후 파생되는 관(館)의 선두 주자로서 역할을 짐작할 수 있다.
청도관 2회 심사대회 이후(단기 4279년 11월 10일로서 서기로는 1946년), 3회 심사대회는 1년뒤 단기 4280년(1947년) 5월 11일로 기록되어 있다.
물론 2회와 마찬가지로 엄운규 전 원장의 모습은 3회에서도 소년 엄운규로서 사진 속에 남아 있다.
 
(당수도 청도관 제3회 심사기념, 1947년 5월 11일)

1947년 5월 11일의 청도관 3회 심사에도 송무관의 노병직 관장의 모습이 보인다.(사진속 이원국 관장 좌측 소년 엄운규 원장, 우측 이용우 정도관장)
이후 해방이 되고 반민특위에서 친일파로 몰려 일본으로 도항할 수 밖에 없었던 이원국 관장은 일본에 체류하면서도 청도관의 창관자로서 활약한 사실이 밝혀졌다.
-이원국 관장 일본으로 도항후 일본내에서 청도관의 활약-
이원국 청도관장은 가장 먼저 국내에서 당수도 청도관을 개관했지만 해방이 되면서 자신이 국내 최초로 개관한 청도관을 뒤로하고 일본으로 피신할 수 밖에 없는 처지에 이르게 된다.
그는 일본에 머물면서도 청도관의 맥을 놓지 않았으며 일본내 수련생들을 지도하고 당수도 청도관 심사대회를 갖는 등 활동을 계속한 사실이 밝혀졌다.

(소화 29년 11월 4일 청도관 당수도 3회 심사 - 일본에서 이원국 청도관장)

위 사진의 일본에서 표기한 소화 29년은 서기로 1954년이다.
일본에서 당수도 청도관을 수련하면서 지도한 이원국 관장은 10여년 지나 국내 정권이 바뀌면서 (이승만 정권 몰락) 다시 귀국하게 된다.
일본으로 도항 후 이원국의 귀국은 10여년이 지난 1950년대 각 기관의 당수도, 공수도가 “태권도”란 명칭으로 정착하려는 과정에서 또 한번 회오리 바람을 일으키게 된다.
-1961년 청도관 이원국 관장의 귀국-
1961년 4월 귀국한 이원국 관장은 가장 먼저 청도관원들로 대대적인 환영을 받게 된다.


(공항에서 엄운규, 남태희, 백준기 등 청도관원들부터 귀국 환영을 받는 이원국)

공항에서부터 귀국 환영식은 시작되었으며, 이때부터 엄운규 원장은 도복입은 소년이 아닌 정장 차림으로서 청년 엄운규로 성장하였다. 당시 청도관의 주역이었던 남태희, 고재천, 백준기 등과 함께 정치적인(태권도제도권) 자리에서 맹활약하게 된다.
그리고 뒤늦게 출발한 다른 관(무덕관, 송무관, 지도관, 창무관) 관장들은 이원국 관장이 없는 1950년대의 10년 동안 초창기 관으로서 자리를 잡게 되고 이때부터는 청도관 이원국 관장과의 관계도 소원하게 된다.
한마디로 일제하에서 실세로 있던 이원국 관장의 갓 떨어진 힘이 필요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청도관내에서 이원국 관장의 1961년의 귀국은 대대적인 환영행사로 이어졌다.


(귀국후 이원국. 이때는 이미 당수도 청도관에서 태권도로 바뀐 상태이며 뒤편에 최홍희 ITF창설자의 태권도 관련 서도가 전시되어 있다. 좌측 엄운규, 우측 남태희)

-청도관과 태권도 그리고 최홍희-
1961년 이원국 청도관장은 해방전 자신이 창립한 청도관을 국내에 남겨 두고 떠난지 10여년만에 다시 돌아왔지만 이미 청도관 내에서도 그가 사용한 “당수도 청도관”이 최홍희로부터 “태권도”란 무도명으로 바뀐 사실을 알게 되고 그를 따르던 청도관의 핵심 제자들인 엄운규, 남태희, 고재천, 백준기 등도 최홍희의 휘하에 들어가고 국내 무도계의 형성은 자신이 주관했던 해방전과 다름을 실감하게 된다.
 최홍희는 당시 군 실세로 등장하여 이원국 관장이 없는 10여년 동안 청도관의 태권도를 군에 보급시켜, 훗날 자신이 창설하는 오도관의 모태로 이용하게 되고 나아가서는 국제기구인 ITF(국제태권도연맹)의 창설을 이루게 된다. 물론 이 과정에서 태권도협회(태수도협회)등이 창립되면서 태권도는 제도권의 큰 틀을 형성하기 시작하였고, 태권도란 무도명이 정착하는 시기와 맞물려 국내 무도계는 한바탕 이권 다툼의 장(場)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그리고 1972년 최홍희가 국내를 떠나는 그 순간까지 태권도는 첨예한 제도권 내에서 자리 싸움과 세(勢)확장의 진흙탕 속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대한민국 무도계, 태권도계를 주도했던 이원국, 최홍희 두 사람은 한평생 당수도와 태권도를 위해 노력했지만 자신의 꿈을 완전하게 이루지 못한채 머나먼 타국에서 생을 마감했다.


(1961년 이원국 관장의 귀국 만찬회 중에서)


(이원국 관장 곁에서 청년 엄운규의 모습. 좌측은 정도관 이용우 관장)

-글: 2010년 2월 정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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