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태기칼럼] 태권도 역사, 누가 만드는가?
[윤태기칼럼] 태권도 역사, 누가 만드는가?
  • 태권도타임즈
  • 승인 2015.03.20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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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태기칼럼] 태권도 역사, 누가 만드는가?
 
 
얼마 전 필자는 안타까운 이야기를 들었다. 모 대학의 교수님께서 학과 학생들에게 “태권도는 진정한 대한민국의 무도가 아닌 가라테의 영향을 받은 짬뽕된 무도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참으로 충격적이었다. 지금도 이러한 분들이 대학의 교수로 학생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치고 있으니 그런 분 밑에서 배우는 학생들이 어떻게 태권도의 정체성에 대해 말 할 수 있겠는가?
 
요사이 아베 신조 일본총리의 ‘역사 왜곡’으로 인하여 외교적 갈등은 물론 ‘역사’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역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과거에 일어난 일들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과거의 기록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양자 모두를 의미하는가? 역사라는 말의 어원을 살펴보면 영어로는 history, 프랑스어로는 histore, 이탈리아어로는 storia라 쓰는데 이는 모두 그리스어 ‘?οτοþ ?α’라는 ‘질문(inquiry)’, 조사(investigation)’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이는 ‘탐구하여 알아낸다.’ 라는 의미이다.
 
그런 의미에서 태권도의 역사를 볼 필요가 있다. 역사학자 E. H. carr의 표현대로 역사란 “현대와 과거 사이에서 끊임없이 오가는 대화”라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필자는 역사란, ‘사료의 객관성도 중요하지만 사료의 재구성이 더욱 중요하다’고 본다. 그러한 의미에서 태권도 역사를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성찰을 통해 태권도의 정체성을 찾는 것이 협회나 국기원, 태권도원 그리고 대학 등 태권도의 제도권에서 해야 할 일이 아닌가 한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우리나라에 부처가 들어오면 한국 부처가 되지 못하고 부처의 한국이 된다. 우리나라에 공자가 들어오면 한국을 위한 공자가 되지 못하고 공자를 위한 한국이 된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오면 한국을 위한 예수가 아니고 예수를 위한 한국이 되니 이것이 어쩐 일이냐? 이것도 정신이라면 정신인데, 이것이 노예정신이다.” 라고 하며 “자신의 나라를 사랑하려거든 역사를 읽을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 나라를 사랑하게 하려거든 역사를 알게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도산 안창호 선생 역시 “묻노니, 오늘 대한의 주인 되는 이가 몇이나 됩니까? 대한 사람은 모두가 대한의 주인인데 주인이 얼마나 되느냐고 묻는다면 이상할 것이외다. 그러나 오늘 대한 사회에 주인다운 주인이 얼마나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잘되고 못되는 것이 모두 나에게 달렸다는 강한 책임감을 가진 자가 진정한 주인이요, 무책임하게 방관하는 자는 손님이외다. 주변을 둘러보아 진정한 주인이 적다 싶으면 빨리 나부터 참 주인이 되도록 합시다.”라고 하였다. 도산 선생의 연장선에서 과연 태권도를 가르치며 태권도로 생활하는 대다수의 태권도인들이 태권도의 진정한 주인인가?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단지 이것은 우리나라 사람이어서도 아니다. 러시아에서 있었던 고대사 세미나 중 U. M. 푸틴 이라는 사학자의 말에서 우리가 무엇을 잃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동북아 고대사에서 단군조선을 제외하면 아시아 역사를 이해할 수가 없다. 그만큼 단군조선은 아시아 고대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런데 한국은 어째서 그처럼 중요한 고대사를 부인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일본이나 중국은 없는 역사도 만들어 내는데, 당신들 한국인은 어째서 있는 역사도 없다고 그러는가.... 도대체 알 수 없는 나라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국기원에서 발간한 태권도 교본에도 단군을 기록하고 있으나 국기원 사범 교육을 위시하여 어느 교육에서도 단군에 대한 교육을 시키는 것을 보지 못했다. 이렇기 때문에 태권도가 짬뽕된 무도라는 소리가 나오는 게 아닌가 한다.
 
백범 김구 선생은 문화에 대해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 남에게도 행복을 준다. 나는 우리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산에는 한 가지 나무만 자라나지 않는다. 들에도 한 가지 꽃만 피어나는 것도 아니다. 여러 가지 나무가 어울려서 위대한 산림의 아름다움을 이루고, 백가지 꽃이 섞여 피어서 봄의 풍성한 경치를 이루는 것이다.”고 하였다. 김구 선생의 말과 같이 태권도도 정체성 안에서 다양성을 추구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정체성을 이야기 하는 태권도인이 별로 없다는 게 문제이다. 2007년 중국 베이징에서 있었던 ‘제18회 세계태권도선수권 대회’에서 “태권도가 중국 고대무술에서 유래됐다(Taekwondo is originally from an cient Chinese martial arts)’며 이는 ‘태권도를 포함한 모든 동양 무술은 중국이 종주국이며 태권도 역시 중국이 종주국’이라는 말을 하여도 그 누구하나 문제제기가 없었다는 것은 태권도를 떠나 ‘민족의 혼’을 잃어버렸다고밖에 할 수 없다. 
 
세계적인 철학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는 “동양학을 공부하던 중 아시아의 위대한 문명의 발상지가 한국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무(無)사상을 동양에서 배웠으며, 그 한줄기를 이용해 이렇게 유명해졌지만, 아직 당신들의 천부경(天符經)은 이해를 못하였으니 설명을 해주십시오.”라고 했다. 이렇듯 우리의 사상은 위대하다.
 
필자는 태권도의 내공수련법을 찾다 『천부경』사상을 알게 되었다. 그 『천부경』에서 기무(氣武) 수련법이 시작되었으며, 그와 함께 우리 역사를 탐구하게 되고 그 안에 태권도의 역사 또한 단군 이전 신시배달국까지도 연결할 수 있는 근거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외국의 사학자들은 우리의 반성을 촉구하고 있다. 부끄럽지 아니한가!
 
도산 선생 역시 “역사를 잃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 자신을 알려거든 바른 역사를 세워야 한다.” “그래도 나라를 사랑하는가? 그러면 먼저 그대가 건전한 인격이 돼라. 우리 중에 인물이 없는 것은 인물이 되려고 마음먹고 힘쓰는 사람이 없는 까닭이다. 인물이 없다고 한탄하는 그 사람 자신이 왜 인물이 될 공부는 아니하는가?” 라고 반문하고 있다.
 
그렇다. 도산 선생의 가르침대로 잘못된 역사는 스스로 잘못을 알고 ‘민족의 혼’이 살아있는 태권도의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한다. 그것은 그 누구도 아닌 태권도인 스스로의 통렬한 반성을 통해 제대로 된 태권도 역사를 세워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태권도의 정체성을 세워야 한다.
 
그래야 태권도가 가라테의 영향을 받은 짬뽕된 무도도 아니며 가라테의 아류도 아닌, 우리 역사 속에서 피어난 무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야 다음세대에게 태권도가 당당하게 우리의 것이라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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