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태기역사칼럼] 태권도협회, 국기원, 대학의 존재 이유!
[윤태기역사칼럼] 태권도협회, 국기원, 대학의 존재 이유!
  • 태권도타임즈
  • 승인 2014.06.30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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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태기 역사칼럼]
태권도협회, 국기원, 대학의 존재 이유!
 
 
 
오랜만에 지나간 영화 한 편을 보았다. ‘인빅터스’라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만든 영화였다. 영화가 전해주는 메시지의 감동이 잔잔하게 가슴으로 전해져 온다.
 
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만든 영화는 대부분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다. 퇴역한 경찰이나 무능한 군인, 그리고 한물간 운동 코치 등을 통해 영화를 보고 있는 사람의 가슴에 뜨거운 감동을 준다.
 
이 영화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만델라 대통령에 관한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되었다고 한다. 27년이란 긴 세월을 감옥에서 지낸 그가 1994년 최초로 실시된 흑백 평등으로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하지만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됐음에도 백인 지배 계층에서는 그를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거기에다 흑인들은 빈곤과 질병에 뿌리 깊은 인종 문제까지 나라의 상태는 그야말로 사분오열되어 있었다. 그런 상태로는 나라를 경영해 갈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하나의 중심 가치를 찾아 국민을 하나로 뭉치게 만드는 것이 급선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때 그가 선택한 것이 국가대표 럭비팀이었다. 거의 백인으로 구성된 럭비 국가대표팀이 영국과 경기를 하는데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흑인 국민들이 자기나라를 응원하는 게 아니라 영국팀을 응원하는 것을 보고 충격에 빠진다. 자국의 백인을 얼마나 싫어하면 같은 백인이지만 상대 팀인 영국을 응원할까. 때마침 남아공이 럭비 월드컵을 개최하게 되자 만델라 대통령은 우승을 목표로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야 되겠다는 다짐을 한다.
 
이후 바쁜 국정에도 불구하고 만델라 대통령이 럭비에 몰두하자 급기야 비서까지 나서서 만류하게 된다. “럭비가 정치적으로 의미가 있나요”라는 물음에 그는 망설임 없이“물론”이라고 답을 한다. 그는 틈만 나면 꼴찌에서 허덕이던 국가대표 럭비팀을 찾아가 선수들을 격려하고 자신감을 심어주는데 애를 쓴다. 우승을 향한 그의 그러한 모습은 TV와 매스컴 등을 통해 전 국민에게 알려지게 되며 온 국민이 우승이라는 목표를 향해 하나가 되기 시작한다.
 
지금의 월드컵 축구경기와 같이 온 국민의 우승 염원을 등에 업은 남아공 럭비팀은 결국 기적과 같은 우승을 일구어 낸다. 피부색과 관계없이 온 국민이 하나 되어 응원한 덕분에 서로의 벽을 허무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흑·백으로 분열된 남아공을 ‘국가대표 럭비팀’을 매개로 국민 화합을 이루어 냈던 것이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오늘날까지도 흑인과 백인 모두가 하나 되어 화합하는 국가가 된 것이다. 
 
 
    ▲ 영화 '인빅터스'의 한장면
 
‘인빅터스’는 ‘굴복하지 않는다’는 뜻의 라틴어로 영국 시인 윌리엄 헨리의 시이기도 하다. 윌리엄 헨리는 결핵균이 뼈에까지 전이되어 25살의 젊은 나이에 다리를 절단하기까지 해야 했다. 이 시는 그가 병원 침상에 누워서 썼다고 한다.  
만델라는 감옥에서 절망을 느낄 때마다 이시를 암송하며 약해져 가는 마음을 다잡았다고 한다.
 
이 영화가 우리 태권도계에 주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우리의 국기라 하는 태권도도 ‘올림픽’이라는 화두가 있었을 때에는 잘못되고 서운한 점들이 있어도 다 묻어두고 하나 되어 올림픽을 위해 모두가 힘을 합쳤다. 그리하여 올림픽에 입성하여 이제는 탄탄한 반석위에 올라가는 듯하다.
 
문제는 태권도가 올림픽에 입성한 후 그들만의 태권도로 향유되고 있다는 것이다. 올림픽 다음의 꿈과 가슴 뛰는 목표를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다. 태권도가 올림픽 정식 종목이 됐음에도 태권도의 세계적 상황은 오히려 퇴보하고 있는 실정이다. 왜 그럴까?
 
태권도의 집행부나 태권도를 전공하는 대학에서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그 많은 태권도 전공자들의 미래는 그들의 문제이지 집행부나 교수들의 역할이 아니라 생각하는듯하다. 요즘 박근혜 정부에서 변혁을 이루고자 하는 화두가 바로 창조이다. 새로운 창조만이 미래에 먹고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며 창조 경제를 부르짖고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태권도는 어떻게 창조를 이룰 것인가?’ 하는 진지한 고민을 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 우리에게 이러한 마음이 필요하다. 지금의 태권도는 어찌 보면 총체적 난국이다. 누구는 그런 소리를 한다. 경쟁력 없는 도장은 도태되는 것이 당연하다. 교육 프로그램이 경쟁력을 잃어 도장 경영이 어려워 진 것이니 문을 닫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지금의 도장 경영을 잘하는 사람들의 대부분(다는 아니겠지만?)은 고객의 니즈를 맞추어야 된다는 경영학의 원리에 따라 그들이 요구하는 교육만을 찾다보니 태권도의 본질은 잊고 본질에서 멀어진 스포츠 형태로 변화되어 가고 있다. 그것이 바람직한지, 아니면 태권도 미래에 큰 위험 요소인지 연구도 하지 않고 그냥 수수방관하고 있다. 
 
제도권인 협회나 국기원에서는 종종 태권도장 활성화를 위해 각종 세미나와 연찬회, 지도자 교육 등을 시도하고 있다. 그러면서 ‘수련 층의 다변화’가 필요하다고들 한다. 그렇다면 진정 많은 계층들에게 ‘왜 태권도를 배워야 하는가?’ 라는 당위성부터 찾아야 한다. 그 물음에 답부터 생각해봐야 한다.
 
필자 또한 태권도의 중진으로 이런 고민을 많이 하고 있다. 그러던 차에 우연히 ‘인빅터스’라는 영화를 접하며 필자의 고민을 해결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본질로 돌아가 ‘태권도를 수련하고자 하는 목적?’ 이것에 대한 답은 다양하게 나오겠지만 우리는 거기서부터 다시 출발을 해야 한다. 우리의 현실을 볼 때 ‘태권도는 아이들만의 전유물인가?’ 라는 물음에 답은 묘연하다는 것이다.
 
우리 태권도계를 앞에서 끌고 가는 협회나 국기원, 대학 등에서는 이것부터 진지하게 고민하였으면 하는 마음이다. 이러한 마음이 진정 태권도협회나 국기원, 대학의 존재 이유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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