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태기 역사칼럼] ‘태권도의 혼(魂)’ , 어떻게 살릴 것인가?
[윤태기 역사칼럼] ‘태권도의 혼(魂)’ , 어떻게 살릴 것인가?
  • 태권도타임즈
  • 승인 2013.04.01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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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권도의 혼(魂)’ , 어떻게 살릴 것인가? 


평안북도 정주에 머슴살이를 하던 청년이 있었다. 눈에는 총기가 있고, 동작이 바르고 총명한 청년이었다. 아침이면 일찍 일어나 마당을 쓸고, 일을 스스로 찾아서 했다. 그는 아침이면 주인의 요강을 깨끗이 씻어서 햇볕에 말려 다시 안방에 들여 놓았다. 주인은 이 청년을 머슴으로 두기에는 너무 아깝다고 생각하고 그 청년을 평양의 숭실대학에 입학시켜 주었다. 대학 공부를 마친 청년은 고향으로 내려와 오산학교의 선생님이 되었다.

요강을 씻어 숭실대학에 간 그가 민족 독립운동가 조만식 선생님이시다. 후에 사람들이 조만식 선생에게 물었다. 머슴이 어떻게 대학에 가고 선생님이 되고 독립운동가가 되었냐? 고….  선생은 그 말에 다음과 같이 답을 한다.
“주인의 요강을 정성들여 씻는 정성을 보여라”
주인의 요강을 닦는 겸손과 자기를 낮출 줄 아는 아량. 그것이 조만식 선생님을 낳게 하였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자신의 할 수 있는 모든 일에 혼신의 힘을 다해 정성을 쏟는 사람을 보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필자 또한 나이가 들어감에 이러한 삶을 살아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하여 필자는 요 근래 주말마다 태권도의 중심인 ‘태권도의 혼(魂)’을 찾고자 태권도 지도자를 만나고 있다. 태권도의 본질을 찾고자, 태권도의 변화를 위해 그리고 태권도의 가치창출을 위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정성을 다하고 있다. 하지만 매번 지역 세미나를 마치고 나면 허전하고 아쉬운 마음이 가슴 가득하다.

필자는 두 번의 대학원 박사과정 공부를 하며 서양과 동양의 철학사상을 접할 수 있었다. 우리 사회는 1800년대에 서양학문이 들어오기 시작한 이래 몇 천 년의 우리 사상과 철학을 넘어 서양학문으로 모든 것들이 덮혀지고 있다.

태권도 역시 예외일 수 없는 듯하다. 태권도에 철학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이야기들을 한다. 하지만 철학이란 모든 것의 근원적인 기초로 철학이 없는 학문이나 철학이 없는 삶이란 존재할 수 없다. 그렇다 하면 태권도의 철학은 무엇일까? 왜 우리는 우리 것의 소중함을 잊은 채 ‘국기 태권도’를 추구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 역시 철학적 사고를 통해 답을 찾을 수밖에 없다. ‘왜?’ 라는 끊임없는 물음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혜안을 주는 것이 철학이라 할 수 있다. 거기에는 현재 태권도가 처한 상황의 비판적인 시각과 반성적 자각이 있어야 한다.
 
인류가 지구에 산지가 오래되었지만 지구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영상을 통해 본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 선조들은 직관과 영감으로 지구를 알았고 지구가 공전과 자전을 하고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현대의 과학을 통해 지구가 허공에 떠있고 자전하고 있고 공전하고 있다는 것이 증명되어 이제는 누구나 지구는 공전과 자전을 하고 있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와 같이 변하지 않는 원리가 우리에게는 존재해 왔다.

그것은 바로 ‘공전과 자전의 원리’와 ‘구심력과 원심력의 원리’이며 ‘공평과 평등의 원리’ 이다. 이 세 가지 원리가 살아나야 태권도의 혼(魂)과 기(氣)가 살아날 수 있다. 이러한 큰 법칙 속에 태권도 역시 그런 관계가 이루어진다면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지도자와 지도자와의 관계, 단체와 단체와의 관계, 협회와 협회와의 관계, 더 나아가 나라와 나라와의 관계가 큰 틀 안에서 모두가 함께 성장하는 좋은 태권도가 만들어 질 것이다.
 
지난 호에 ‘공전과 자전의 원리’에 대해 이야기 했으므로 이번 호에는 ‘구심력과 원심력의 원리’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통제받지 않고 밖으로 나가고자 하는 성향이 있다. 하지만 구심이 없는 원심은 있을 수 없으며, 원심이 없는 구심 또한 존재할 수 없다. 정월 대보름에 불 깡통 돌리는 것을 보면 이해하기 쉽다. 구심력은 원심력에 의해 현실화되는 힘이고, 원심력은 구심력의 존재를 전제로 했을 때 발휘되는 힘이다. 원심력이 없으면 구심력은 잠재적으로만 존재할 뿐 현실적인 힘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 원심력이 구심력보다 더 크면 부분은 전체에서 떨어져 나가 버린다. 결국 전체의 조화로운 운동을 위해서 원심력은 구심력에 맞추어 스스로를 조절해야 하는 것이다. ‘구심력과 원심력’의 균형이 맞출 때만 전체 시스템이 유지되는 것이다.

수련생과 사범과의 관계, 사범과 관장님, 개인과 도장, 도장과 시도협회, 시도협회와 중앙협회와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 원리이다.
‘구심력과 원심력’의 원리는 ‘공전과 자전’의 원리를 더욱 확립시켜 ‘혼(魂)’을 찾고 성장시켜 완성시키는 원리이다.
 
다음은 ‘공평과 평등’의 원리이다.
‘공평과 평등’의 원리는 각 부분의 차이에 대한 공정한 평가를 근거로 전체의 균형이 유지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차이에 대한 공정한 평가가 전제되지 않았을 때 평등은 기계적이고 비생산적인 평준화로 전락해 버리고 만다. 이것은 마치 어른과 아이에게 똑같은 양의 밥을 주고 똑같은 양의 일을 하라는 것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그냥 평등이 아니라 공평을 전제로 한 평등이 되어야 한다. 인간관계나 사회생활에서 자칫 잘못하면 오해가 따르게 되고 상호 소통이 막혀 경직되기도 하는데, ‘공평과 평등’의 원리는 이를 풀어준다.

이처럼 사람의 혼이 깨어나 마음의 중심을 잡게 된 상태를 현대 단태권도에서는 ‘공전과 자전’의 원리, ‘구심력과 원심력’의 원리, ‘공평과 평등’의 원리로 설명하고 있다. 이 원리는 비단 개인이나 단체를 넘어서 사회나 국가 간에도 지켜져야 할 원리로 하루 빨리 태권도에서 이 원리를 받아들여 하나 될 수 있을 때 태권도의 앞날은 밝게 빛날 수 있다.

중단전의 ‘혼(魂)’은 상단전의 ‘영(靈)’과 하단전의 ‘백(魄)’을 연결한다. ‘혼’이 떠나면 ‘영’과 ‘백’은 분리된다. ‘혼’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완성)가 되게 된다. 역동적인 단결력을 발휘한다. 다시 말하면 중단전의 ‘혼’은 상단전의 ‘영’과 하단전의 ‘백’을 연결하여 자신의 쓰임새를 통해서 완벽한 하나를 만드는 역할을 한다. 지금의 서울을 시대에 따라 서울이라 부르기도 하고, 경성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한양이라고 부르기도 기도 하듯이 ‘영을 신’이라 부르기도 하며, ‘혼은 기’로, ‘백은 정’으로 부르기도 한다. 위에서 혼은 영과 백을 연결한다고 했듯이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기(氣)는 정(精)과 신(神)을 잡고 있어야 하는데 기가 약해 정과 신을 제대로 잡지 못하면 ‘정신이 이상하다’ 고하며, 더 심하면 정신이 끊어지게 되어 그것을 정신분열이라 한다.
 
‘혼(魂)’은 성품, 성질, 기품, 기질로 나타난다. 혼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혼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드러내 주는 것이 바로 성품이다. 성품은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혼의 모습이다. 성품이 혼의 성장 정도를 보여준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선택을 하고, 그 선택에 대해 평가받고, 평가를 통하여 자신을 돌아보고 다듬어 나가는 중에 우리의 성품이 모양을 갖추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때로는 부딪히고 깨지는 고통을 겪기도 하지만, 그러는 중에 조화롭고 덕스러운 성품, 막힘도 걸림도 없는 자유자재로운 성품이 만들어 진다.

혼은 개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라에도 있고 태권도에도 있다. 나라의 혼을 ‘국혼(國魂)’이라 한다. 국혼의 근본은 개인의 혼에 근거 한다. 개인의 혼이 뭉쳐져 국혼이 되는 것이다. 나라를 지탱해오는 근본이 국혼이고, 정체성이며, 정체성은 정치 이념이 되어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우리 역사를 살펴보면 국가의 흥망성쇠도 여기에 기인한다. 이와 같이 태권도에도 ‘태권도의 혼’이 존재한다. 즉 혼이 없으면 개인도 국가도 패망하게 됨을 보여주듯이, 태권도 지도자 한 사람 한사람에게 태권도의 혼이 없다면 태권도의 미래는 어떻게 될 까? 태권도가 세계의 최고 존재가치를 찾기 위해서는 혼을 살리고 활용하지 못한다면 지금의 태권도가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무너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즉 처방약이 있음에도 그 약을 써보지도 못하고 죽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하겠다.  
 
지난 호에서 강조 하였듯 ‘혼(魂)’은 ‘기(氣)’를 통해야만 알 수 있다.
하지만 ‘기(氣)’를 안다고 해서 ‘혼(魂)’을 정확하게 체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기(氣)’의 근원에 ‘혼(魂)’이 자리하고 있다. 이러하므로 ‘혼’이 ‘기’를 조정하게 된다. 이것이 한국선도 수련의 상단전·중단전·하단전론이다.

태권도는 몸의 움직임을 통해서만이 건강도, 또 그 안에 내재된 철학 속에 수련이 전제되어 체험을 통한 원리를 터득해야 한다. 그렇게 하다보면 지금과 같은 혼란상은 사라지고 진정한 태권도 지도자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그래야만 태권도의 모든 수련층(남·녀·노·소) 을 품을 수 있는 진정한 국기 태권도로 다시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지도자 모두는 ‘공전과 자전’과 ‘구심력과 원심력’ 그리고 ‘공평과 평등’의 원리 속에 조만식 선생의 요강을 정성들여 씻는 마음으로 ‘태권도의 혼’을 살리는 주인공으로 거듭 나자.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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