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특집2
창간특집2
  • 태권도타임즈
  • 승인 2010.02.01 18:5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엄운규 전 국기원장과 태권도史-2

-청년 엄운규-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엄운규 전 국기원장은 1946년 청도관 제 2회 심사대회에서는 소년 엄운규로서 활동을 했다.

그의 행보는 청도관 창설자, 이원국관장을 비롯하여 태권도 태동기의 인맥을 두류 섭렵하듯이 가까이 했으며 청년기에도 변함이 없었다.

1960년대 후반 국제태권도연맹(ITF)과 대한태권도협회, 각관의 치열한 태권도 세력다툼 속에서도 엄운규 전 원장은 ITF와 대태협을 오가며 활동을 했다.

이때부터 엄운규 전 원장은 행사 때마다 도복이 아닌 정복차림으로서 태권도란 명칭이 생긴 이후의 활동을 주도하기 시작한다.

-이원국관장과 엄운규-

태권도 사학(史學)들이 연구한바와 같이 청도관은 이 땅에 가장 먼저 창관한 당수도 도장이었다. 이원국관장은 청년시절 일본에서 고등학교와 대학을 공부하면서 쇼도깡 가라데를 익혔으며 해방 전부터 일제의 세력을 등에 업고 국내에서 당수도를 가르쳤으며 그 가운데 소년 엄운규가 등장한 것이다.

해방이 되자 일제하에서 활동한 이원국관장은 청도관을 버리고 일본으로 도항해서 미국에서 망명 아닌 망명생활을 하다가 1961년 국내로 다시 입성해서 잠시 태권도계를 좌우지해보지만 오래 버티지 못하고 다시 미국생활로 돌아가게 된다.

그런 와중에도 엄운규 전원장의 활동은 대단했다고 볼 수 있다.

엄운규 전 원장은 1959년 9월 3일, 최홍희 국제태권도연맹 총재와 황기, 윤쾌병, 노병직, 이남석, 현종명 등과 함께 대한태권도협회를 주도했다.

물론 제도권의 태권도史애서는 1959년 대태협 창립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정치적으로 이승만정권의 몰락기에 탄생한 대태협은 1961년 태수도협회 창립을 태권도역사에 기록함으로서 최홍희 전 국제태권도연맹의 총재를 사장 시킨 것이다.

해방이후 각관의 창관과 함께 태권도 제도권이 형성되면서 초대관장들과 함께 그 밑에서 수련한 1세대들은 치열한 줄서기와 함께 인맥구성에 혈안이 되었다.

그중에서 몇몇 사람들은 처음 형성되는 태권도 제도권에 진입 승승장구 출세의 가도를 달렸지만 줄을 잘못 선 사람들은 해외로 빠져나가거나 영원히 제야 권에서 묻혀 살게 된다.

태권도 경력으로 말하자면,  김운용 전 총재의 할아버지뻘 되는 엄운규 전원장이 김운용의 밑에서 오랫동안 장수한 자존심은 그 만의 비결(?)이라면 비결이다.

하지만 무도의 자존심을 끝까지 굽히지 않은 각관의 창설자들과 1세대 태권도인들은 제도권에 진입하지 않고, 국내를 떠나 해외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지금의 제도권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현 이승완원장을 비롯한 여러 하수인(?)들이 전수받은 출세의 방법들이 창출한, 태권도史적 측면에서 잘못 기록된 태권도史는 앞으로도 많은 연구와 노력이 필요하다.



(위로부터 엄운규,이용우,남태희 그 아래에 남태희,엄운규,현종명 그리고 이원국관장과 최홍희 ITF총재와 엄운규 등)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