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도의 뿌리를 찾아서-YMCA권법부 창무관편
태권도의 뿌리를 찾아서-YMCA권법부 창무관편
  • 태권도타임즈
  • 승인 2010.05.26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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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대한태권도협회와 국기원이 활성화 되면서 관 통합의 원칙이 세워지고 80년 국보위에서 주도하여 각 관이 사라지게 되면서 태권도의 근간을 이루던 관제도가 사라져 현재의 태권도계가 안고 있는 각종 문제점을 잉태하게 되고 그 씨앗들이 태권도계의 난맥상을 만들게 됨에 따라 태권도계의 원로들이 예전의 관을 중심으로 다시 모여 태권도의 바람직한 발전 방안의 하나로 관 제도의 복원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본지에서는 이러한 각 관의 모임을 찾아 태권도의 뿌리라 할 수 있는 각 관의 역사에 대해 들어보고 태권도의 역사라 할 수 있는 자료들을 찾아 영구히 보존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한다. 이번호에서는 창무관의 역사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하고 다음호에 이어서 창무관 원로들의 태권도이야기를 싣고자 한다. -편집부-

 


                                                                             1948년 12월 21일 체신부 권법 제1회 심사회

창우회는 태권도계가 어수선하고 위계질서가 무너지는 등 무도의 본모습을 잃어가는 것이 안타까워 자신들의 조그만 힘이나마 태권도의 발전에 힘을 보태고 나아가 예전의 관 제도를 복원하기 위해 창무관 출신들의 고단자들이 모여서 예전 창무관 시절의 단증발급대장, 관인철, 사진 등 각종의 자료들을 수집하고 창무관 출신 인사들을 규합하는 등의 노력을 오래전부터 하고 있으며(창우회는 70년대부터 존재하던 창무관 고단자들의 친교모임이었는데 관 통합이후 창무관 출신 인사들의 교류의 장으로 자리 잡음) 현재 퇴계로 5가에 사무실을 두고 정기적으로 회합을 가지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1957년 10월 13일 창무관 제15회 진급심사회

창우회의 주요 구성 인물로는 김선구원로 등 박용직, 김도영, 유학식, 성태경, 이우모, 김호재 등이 주축을 이루며, 그 외의 많은 창무관 출신 인사들이 참여하여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다.

창무관은 일제 강점기에 중국과 일본에서 각각 권법과 공수도를 연마한 윤병인선생(일본 중앙대학졸업)이 해방 몇 해 전 귀국하여 경성농업학교(현 서울 시립대학교)에서 교직에 있으면서 공수도부(권법부)를 창설하여 학생들에게 수련을 시키다가 1945년 해방을 맞아 국민들의 체력증진과 정신수련을 위해 공수도를 보급하고 발전을 위해 노력하게 되었다.


                                                                                        창무관 단증 수여 장부

직장도 경동고등학교로 옮기고 성균관대학에서도 공수도부를 창설, 육성하기 위해 노력하던 중 서울기독교청년회(YMCA) 체육부에 공수도부(권법부)를 만들어 창무관이라는 명칭을 내부적으로 사용하면서 창무관의 역사가 시작 되었다. 당시 YMCA권법부에는 이남석, 박철희, 김동희, 홍정표, 송석주, 박희태, 김순배, 김선구, 박규응, 손철준, 김득환, 곽성규 등이 고단자로 수련을 하며 도장의 질서가 잡혀가게 되었다.

1947년 3월 5일 이남석 고단자가 근무하던 체신부 체육회의 승인을 받아 창무관 지관을 열게 되었고 국립체신학교에도 태권도부를 창설하여 지도하였다. 그러던 중 1950년 6.25사변이 발발하여 도장은 파괴되고 관원들도 뿔뿔이 흩어져 일부는 입대하고 일부는 피난을 가서 부산에서 도장을 열고 수련을 하였으나 유명무실 하다시피 하였고 전쟁의 와중에 윤병인선생이 납북되는 등 혼란한 세월을 보내다가 1953년 휴전이 되자 다시 서울로 모여서 1954년 이남석(창무관 2대관장)사범을 위시한 곽성규, 손철준, 김선구 등의 관원들이 주축이 되어 체신부위 인정을 받아 서울 체신청(현 세종로 정부종합청사)자리에서 창무관을 재건하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교통이 불편하고 도장도 기본도장 외에는 없었다.

개관 2주년을 맞이한 1956년에는 유단자의 수만 50여명에 이르게 되었고 수련생의 숫자도 1,000여명에 이르는 등 급속한 성장세를 이루었으며, 육군본부 군악대(현 장충동 자유 총연맹 자리)와 의장대(현 국방부 청사)대원들도 다수 관원으로 수련을 하게 되었다.

태권도 창무관이 발전을 거듭하고 서울의 인구가 팽창하게 되면서 청량리에 동아체육관(관장, 김순배)과 왕십리에 성동체육관(관장, 김선구)이 처음으로 지관으로 문을 열게 되었으며 이후 서울시내와 지방에 우후죽순처럼 지관들이 생겨나 전국에 100여개의 지관이 만들어졌다.

욱일승천의 기세로 성장을 해 나가던 창무관이 대한태권도협회의 관 통합원칙에 따라 관의 명칭을 공식적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1982년 10월 30일 이남석관장이 도미를 하면서 지금의 김순배관장에게 관장직을 승계하여 지금까지 김순배관장이 내부적으로 창무관을 대표하고 있다.                                     -류화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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